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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희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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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center"><br /><br /><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12pt;"><strong>소 개 글</strong></span><br /><span style="font-size: 12pt;"><strong></strong></span><p align="left"><br /><br /><p align="left"> <span style="font-size: 12pt;"> 프란치스코</span><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 빨라우 신부는 1840년 프랑스에 도착할 때부터 [하느님과 영혼의 씨름]에서 가르친 대로 생활했다. 추방된 빨라우 신부는 동료들과 추종자들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봉쇄 가르멜에서 키워 온 수도성소의 관심에서 보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빨라우 신부의 바람과 목적은 확고했다. 빨라우 신부는 1835년 갑작스러운 봉쇄규율해제로 고독 속에서 지내며 관상적 성소의 의미를 체험하였다. 그는 수도서원을 하는 순간에 이런 사건들을 매우 잘 납득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지킬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의무를 다하는 데에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수행자나 은수자나 은둔자로 살기 위해서 이내 무너지고 말 건물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오직 성소만이 필요했다. </span></span><br><p align="left"><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br /></span></span><br><p align="left"><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 이 소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빨라우 신부는 모든 면에서 충만해 있었다. 빨라우 신부의 내면에는 교회에 대한 사랑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악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열망을 느꼈다. 그러나 오직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하느님과 씨름' 할 뿐이다.빨라우 신부의 머릿속에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유일한 방식이었다. 빨라우 신부는 모든 것에 항구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고 고행하며 은둔하는 생활를 하였다.</span></span><br><p align="left"><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br /></span></span><br><p align="left"><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span></span><br><p align="left"><br>
<p align="center"><br /><br /><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 12pt;"><strong>소 개 글</strong></span><br /><span style="font-size: 12pt;"><strong></strong></span><p align="left"><br /><br /><p align="left"> <span style="font-size: 12pt;"> 프란치스코</span><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 빨라우 신부는 1840년 프랑스에 도착할 때부터 [하느님과 영혼의 씨름]에서 가르친 대로 생활했다. 추방된 빨라우 신부는 동료들과 추종자들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봉쇄 가르멜에서 키워 온 수도성소의 관심에서 보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빨라우 신부의 바람과 목적은 확고했다. 빨라우 신부는 1835년 갑작스러운 봉쇄규율해제로 고독 속에서 지내며 관상적 성소의 의미를 체험하였다. 그는 수도서원을 하는 순간에 이런 사건들을 매우 잘 납득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지킬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의무를 다하는 데에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수행자나 은수자나 은둔자로 살기 위해서 이내 무너지고 말 건물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오직 성소만이 필요했다. </span></span><br><p align="left"><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br /></span></span><br><p align="left"><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 이 소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빨라우 신부는 모든 면에서 충만해 있었다. 빨라우 신부의 내면에는 교회에 대한 사랑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악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열망을 느꼈다. 그러나 오직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하느님과 씨름' 할 뿐이다.빨라우 신부의 머릿속에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유일한 방식이었다. 빨라우 신부는 모든 것에 항구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고 고행하며 은둔하는 생활를 하였다.</span></span><br><p align="left"><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br /></span></span><br><p align="left"><span style="font-size: 12pt;"><span style="font-size: 12pt;"></span></span><br><p align="left"><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