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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수 생활. 깐따일락의 은수자 (P28-P32) 7.공적으로 증거하는 마음
작성자 박덕조 보나
작성일자 2022-06-19
조회수 1179
7. 공적으로 증거하는 마음

    32. 이 모든 일이 있은 후, 나는 하느님의 옥좌 앞에 나아가 교회로부터 파견 받은 자인 사제로서 사제 직무를 나타내는  제의를 입고 기도의 향을 뿜어내는 향로를 들고 하늘에서 너거럽게 받아주시도록 희생 제사를 봉헌하였다.

    나는 고소인들이 지고한 재판관에게 우리에 대해 털어놓는 정당한 불편을 들은 후(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르4,23: 마태:19,2 묵시 13,9참조}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고독한 곳에 머물며 십자가를 손에 쥐고 가르멜 수도복 또는 은수자 수도복을 입고서 대중 앞에 나타났다. 내 편에서는 할 수 있는대로 추문에 맞서 공적이고 형식에 맞게 이의를 제기하며 하느님 정의의 저울에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 했다. 동시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모든 사람에 맞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했다.

    33. 나는 소송을 방어하는 데에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고소인들의 고발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모든사람과 교제를 끊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렇게 했다. 영혼이 하느님의 옥좌 앞으로 올라가고 소송에 주의를 기울여 변호하기 위해 산 채로 땅 속에 묻힐 필요가 있다고 하면 나는그렇게 했다. 나는 제대 앞에 있는 사제로서, 소송의 변호자로서 소송의 내막을 확실한 방식으로 정확히 알기 위해 바위 꼭대기에 내 거주지를 정하거나 이 오두막에 갇혀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면 나는 그렇게 했다.

    34. 나는 이 은수생활 양식이 증오심을 불러일어킨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제단을 맡아보는 사제로서 나에게 맡겨진 직무를 더 완벽하고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은수 생활로 부르는 부르심이라고 느꼈으므로 다른 방법으로는 살아 갈 수 없었다.

    내가 오류에 빠졌거나 환상 속에 있을때, 악마가 다가와  내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확실히 본다면 얼마나 행복해하며 이 환상을 즐기겠는가!

    하느님 옥좌 앞에서 주님의 사제로서 그리고 제단을 맡아보는 성직자로서 책임을 져야하는 범죄들이 사실이 아니라 없던 것이고 거짓말이었으며, 이 고소가 중상모략이었기에 하느님의 정의로 보속이 필요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또한 이 재판은 과도한 상상력으로 허공에 만든 성일 뿐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며, 얼마나 편하고 얼마나 큰 만족을 누리겠는가? 그러나 이 무슨 소리인가?  나는 불행하게도 내 자신이 바로 직접 보았던 사건들에 데해 나를 속일 수 있을까?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사건들에 대해 환상을 가질 수 있을까?

   35.고독한 장소를 떠나 몇 발자국만 나가면 악이 승리하는 것과 덕이 억압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잘못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다!
    한없이 올바르신 재판관은 옥좌에 앉아[묵시 22,3참조] 고소에 맞서 대응하도록 교회의 모든 대표자들과 제단을 맡아 보는 모든 성직자들을 부르셨다. 사제 직무는 내게 소송을 방어할 의무를 주었으며, 은수생활은 이 성스러운 의무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완수하게 하는 생활양식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러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이 목적을 위해 나는 완전한 고독과 깊은 침묵 속에서 한 마디로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것이 가장 유용하며 나에게 있어 또 나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다. 아! "은혜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생명의 나무에서 뽑아버러십시오" [다니엘 4,11;묵시 22,19참조]라는 목소리가 들릴 때 큰 싸움을 하는 목적을 한순간도 흩어지지 않도록 무덤 속에 내 몸을 묻고 싶었다.

    36. 나는 사제로서 싸울 때에 단지 맞서 싸우지는않았다. 마지막 때에 유대 백성의 수호천사들이 그들을 굳건히 지키러 나설 것이다[다니 12,1-4]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죽인 죄는 충분히 벌을 받을 만하며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서 잠자고 있는 이방인 나라들의 수많은 대천사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청한다고 적혀있다.

      이처럼 동방교인들과 개신교인들과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모든 백성의 수호천사들은 그들에게 생명의 문을 열어 달라고 청한다.

      이 모든 수호천사들은 아무 방식으로나 우리에 맞서 싸우지는 않는다. 천사가 우리에게 맞서는 경우는 주님의 자비가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진 백성 위에 풍성하게 내리는 데에 장애가 되는 우리의 타락과 게으름, 미지근함과 범죄, 배은망덕할 때이다.

      이러한 경우에 천사들은 부르짖는다.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로마 교회가 아닌 반그리스도인들이나 불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생명의 나무에서 잘라내십시오." [묵시 22,2; 다니 4,10-11참조]라고 외친다.

      한 번에 잘라내라는 이 간청이 모욕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가지가 나무 전체를 썩게 한다면 주인은 당연히 가지를 잘라낼 것이며 정원 관리자가 주인에게 가지를 잘라내게 해 달라고 청한다 하여 절대로 주인을 노하게 하지 않는다. 썩은 가지에게는 불리한 기도가 되겠지만 다른 모든 나뭇가지들에게는 이득이 되는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37. 이러한 싸움을 하는 동안 나는 바위의 가장 높은 곳이나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 방을 마련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그리스도교 백성과 그 백성의 성직자들이 닦은 덕행과 저지른 범죄를 관상하였다.

나는 이모든 것을 하느님 정의의 저울 한편에 놓았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동방정교인들과 개신교인들과 또한 불충실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나는 모든 악과 덕을 찾아내어 저울의 다른 한 편에 놓고, 정의와 자비 중 어느 쪽으로 더 기우는지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았다. 악과 덕의 무게를 재는 일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마음 깊숙이 숨어있는 지향과 그 마음을 완전히 아시는 하느님만이 그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도를 하러 높은 곳에서 내려와 통곡과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장소로써 땅 속 굴을 찾았다. 고독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 어떤 때는 바위 꼭대기에 숨었으며 어떤 때는 땅 속에 들어가 소송을 방어하기 위해 시간을 희생하는 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