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언론인
빨라우 신부의 사목적 활동이
비록 현대의 전문적 활동과 반드시 같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그를 언론인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물론 그는 언론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쌓은 것은 아니지만,
언론 활동이 사회적인 모든 종류의 일에서 선과 악의 가장 기민하고 효과적인
무기일 수 있다는 언론의 중요성을 비상한 안목으로 꿰뚫어 보았다.
어쩌면 언론이 중요성에 관한 그의 이해는
언론인으로서 성취한 그 어떤 결과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한순간의 주저도 없이 펜을 쥐었다는 단순한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개성과 진가를 보여 주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현저한 공헌을 한 것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였는데
종교적인 생활을 지지하는 언론을 움직이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거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일 ‘덕행 학교’를 운영하던 바르셀로나의 『엘 앙코라(El Ancora)』지의
고정 기고가가 됨으로써 언론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신문을 통한 고정 기고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정기간행물들에
영향을 끼치게까지 하였다.
그는 덕행 학교의 옹호자들과 비방자들이
신문지상을 통해 벌인 논쟁들을 매우 면밀히 검토하고는 그 반격으로
『덕행 학교 변호론』(1859년)이라는 그의 저서를 발췌하여 다시 실었다.
언론을 통하여 교회를 옹호한 이 분야에 있어서,
빨라우 신부의 모든 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은
1868년에 『은수자(El Ermitaño)』라는
힘 있는 제호로써 정치적이고도 종교적인 주간지를 창간한 일이었다.
이 주간지는 그해에 있었던 혁명에 따른 필연적 결과로 창간되어
혁명의 반종교적인 선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데에 이바지하였으며,
동시에 종교 홍보의 수단으로서 구마에 대한 이론 개진(改進)의 장이었다.
이 주간지는 빨라우 신부에 의하여 1868년에 시작되어 1년 남짓 지속되었다.